노인의 날을 공휴일로 지정해 주십시오!

작성자: 노인박사님    작성일시: 작성일2020-09-22 14:09:09    조회: 13회    댓글: 0
2020년 10월2일 제24회 노인의 날에 즈음한 단상

<다시보고싶은 기사>1968년에 노인의 날 만든 이돈희 선생이 2006년에 쓴 특별기고

조영관 발행인  | 입력 : 2020/09/22 [07:54]

  ▲  노인의 날 만든 이돈희 월드레코드 대표,  다시 올리는 글  © 챌린지뉴스
 
2013년과 2017년에 주승용 국회의원이 노인의 날 공휴일 지정 발의했고,  올해 9월8일에는 국민의 힘 하영제 국회의원이 공휴일 지정을  발의했다.

국회에서 몇차례에 걸처 노인의 날 공휴일 지정발의는 했지만 매번 실패했다.

그런가운데 고등학생때부터 노인의 날 기념일을 만들어 행사를 주관하고

결국 국가에서 노인의 날을 제정하는데 큰 기여를 한분이 바로 이돈희 선생이다.

우리나라에서 처음 1968년에 노인의 날을 만들 당시부터 노인의 날의 공휴일 지정을 수십 차례 제안하기도 하였다.

올해 10월 2일을 노인의 날을 앞두고(올해는 추석연휴와 겹치는 관계로) 9월 25일에 노인의 날 행사를 한다.

 이돈희 선생은 2006년에도 <노인의 날을 공휴일로 지정해 주십시오!>라고 글을 기고했다.

노인문제연구와 노인존경에 대한 선구자적인 분이다. 하지만 기존 노인회 단체에서는 선거제와 정부 지원단체 등으로 인하여  선구자 이돈희 선생을 비주류로 여겨 관심을 갖지 않고 있다.

  2021년은 그가 노인의 날을 만든지 53주년, 제 1회 노인의 날 행사한지 50주년, 국가에서 제정한 노인의 날 24주년 되는 해이다. 노인회 단체는 지금부터라도 이돈희 선생의 거룩한 정신을 존중하고, 공식행사에 고문 등 격에 맞는 자리를 찾아주어야 한다.

< 정리: 조영관 발행인· 도전한국인본부 대표〉

      하영제 의원(사천·남해·하동)은 8일 국경일과 국가의 중요한 기념일을 공휴일로 지정하고, 노인의 날(10월 2일)을 공휴일에 포함하는 ‘공휴일에 관한 법률안’을 대표 발의했다고 밝혔다. 

하 의원은 “대통령령으로 ‘관공서의 공휴일에 관한 규정’으로 지정하고 있으나, 공휴일의 일수가 늘고 국민 생활에 미치는 영향력이 커져 법률로 제정할 필요성이 대두되고 있다”라고 법률안 제정 이유를 설명했다.

 또한 “고령화에 따라 노인들의 사회활동이 활발히 전개, 사회 전반에 걸친 공헌도가 더욱 높아지고 있다”며 “노인의 날을 국가 공휴일로 지정 노인에 대한 국민적 관심을 일깨우고 효친경로의 미덕을 실천할 수 있도록 하자”라고 강조했다.

 노인의 날 국가 공휴일 지정 추진은 고령화 사회에 접어든 우리 현실에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 노인문제 해결에 국민적인 관심을 촉구했다. 

2019년 현재 우리나라 노인 인구 비율은 14.9%로 고령화가 급속도로 진행, 2060년 43.9%가 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이 같은 추세가 지속될 경우, 2040년 우리나라의 고령화 비율이 일본에 이어 세계 2위가 된다. 

일본은 이미 1954년 노인의 날을 국가 공휴일로 지정한 반면, 우리 사회의 노인 문제에 대한 인식은 상대적으로 매우 취약한 실정이다.     

  2020년 10월2일 제24회 노인의 날에 즈음하여

-1968년에 노인의 날 만든 이돈희 다시 올리는 글

-출처 : 『참좋은이들 21』 2006년 5월호  특별기고 

  '대통령·장관·국회의원님,  노인의 날을 공휴일로 지정해 주십시오!' 

 " 5월의 어버이날과 10월의 노인의 날이면 생각나는 것"   
 

 이돈희  아버지날과 노인의 날 만든이 (감정평가사 · 예수님생애연구소장 · 『효친경로사상의 부활을 위하여』저자)

 선린상고(현 선린 인터넷 고등학교) 2학년 때인 1963년에 <아버지날>과 동국대학교 4학년 때인 1968년에 <노인의 날>을 만들었던 필자는 만들고서 남다른 걱정이 있었다.

 실종되어가는 효사상을 부활시키기 위하여 필요한 <아버지날>을, 경로사상을 부활시키기 위해서 반드시 있어야 할 <노인의 날>을 청소년때 만들고서도, 이름마저 너무 없다보니 누구 하나 나서서 도와주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저들이 몰라서 그렇지 이런 일은 발로 찾아다니며 발굴해야 하고, 좋은 여론을 선도해야 할 그 수많은 신문, 잡지, 방송 등 언론 매체마저 무명인인 필자가 가까이 하기엔 이광조의 노래가 아니라도 ‘가까이 하기엔 너무나 먼 당신’이었다. 어떻게 그리 쉽게 무시하고, 대꾸조차 안 해주는지 어렵게 찾아간 유명인사나 언론기관에게서 거절에 거절을 당할 때마다 가수 이남이의 히트곡처럼 ‘울고 싶어라’였다. 무명인의 비애를 절감했다.

  이 일을 해 볼수록 필자가 하나의 ‘작은 유리구슬’과 같은 존재라면, 각 가정과 특히 사회와 국가는 ‘너무도 큰 바위’임을 절감했고, 행여나 부모를 잘못 만난 <아버지날>과 <노인의 날>이 어릴 때부터 건강이 매우 나쁜 나의 사망(死亡) 함께 사장(死藏)이 될 것만 같았다. 

솔직히 필자는 철들기 전  서너살 때부터 온갖 잡병(雜病)을 지니고 살다보니, 기초 체력이 없는데다 나이 59세가 되는 지금까지도 치료를 위해 각종 병원과 한의원과 약국을 내집 드나들듯 했고, 여러가지 수술도 했고, 한창 좋은 나이인 대학생 시절마저 폐결핵으로 고생하고, 치유되었는 줄 알았는데 1년만에 재발까지 되어서 몇 년 간 더 고생을 한 후론 건강에 도대체 자신이 없었다. 

  건축현장 소장으로 부산 광안리 현장에서 고된 일을 하시던 아버지에게 "아버님전 상서! 아버님께 불효만하던 제가 곧 죽을 것 같습니다. 어제와 오늘도 각혈을 했습니다. 살아 있으면서 마음대로 숨을 쉴 수도 없고, 나날을 이렇게 아프기만 하니 이렇게 살기 보다는 차라리 제가 죽는 것이 멀리서 온갖 고생하시는 아버님께 조금이라도 불효를 덜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아버님이 애써 벌어 주신 등록금으로 다닌 대학의 졸업도 1년이 채 안 남았으니, 졸업도 하고 싶고, 졸업 때까지만이라도 꼭 살고 싶습니다." 란 요지의 편지를 유서로 보내드리기도 했다.

  지금 생각하면 더 이상의 불효가 아니도록 아버지 가슴에 대못을 박았고, 걱정을 끼쳐드렸는지 모른다. 82세이던 작년에 폐혈증으로 작고하신 아버지에 대하여, 우리 자녀들이 각 가정의 아버지에게 효도하자고 고등학생 때 <아버지날>을 만들었음에도 대학을 다니면서 자식으로서 정작 아버지 마음을 너무도 몰랐던 어리석음을 석고대죄를 하고 싶은 심정이다. 

유서에 쓰지는 못했지만, 아버지날과 노인의 날이 국가에서 제정되고 그 결과로 각 가정과 사회에서 부활되는 효친경로의 모습들을 보고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항상 했었다.

 청년으로 한창 건강할 나이인 대학생 때에도, 두 시간 연속되는 강의는 허리가 아파 그냥은 못 듣고, 강의 중에라도 염치불구하고, 학기말 시험 범위를 알려준다 해도 반드시 강의실 근처에 있는 잔디밭이나 벤치에 나와서 잠시라도 누워있다가 다시 들어가야만 강의를 들을 수 있었다.

친구들은 한참 수업을 듣고 있는데, 잔디밭이나 벤치에 혼자 누워 있을 때는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과 둥둥 떠다니는 구름,  이리저리 나풀너풀 날아다니는 흰나비 마저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아버지날과 노인의 날을 만들긴 했지만, 아무도 호의를 가져주지 않아서, 이를 신문과 잡지에 광고하는 캠페인 비용을 벌고자 주중에는 중고등학생들의 가정교사를 했고 주말에는 서울 광화문에서 신문 가판 아르바이트를 하였다. 2학년 내내 폐결핵으로 고생했는데, 4학년 때 재발이 되자 처음 발병 때보다 기침도 심하게 하고 오랫동안 각혈이 멈추지 않을 때면, 결국 이러다 죽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많이 들었기 때문이다. 1960년代만 해도 폐결핵은 참 무서운 병이었다. 의술도 지금처럼 발달하지 않았고 보험도 없던 시절이라 심하면 가산을  탕진하고 성과 없이 죽어가는 병이기도 했으니까.

 몸 아픈 대학생의 아르바이트라는 것이 벌어도 벌어도 여의치 않아, 주사비와 약 값이 모자랄 때는 학교를 오가다 중구 보건소에 들려서 필요한 약은 타 먹었지만, 각혈이 심할 때는 가정교사 아르바이트마저 할 수가  없었다.   

 부모님이 수고하셔서 마련해 주시는 등록금만도 미안한데 아무도 알아 주지 않고, 언제 제정될지도 모르는 아버지날과 노인의 날을 사회에 알리기 위해 드는 신문 잡지의 광고료까지 부모님의 신세를 질 수는 없어 내 힘껏 벌어서 하고자 아르바이트를 했던 것이다. 

  이화여대를 찾아가 1968년 5월 20일자 <이대학보>에 조그맣게 <아버지날> 광고를 낸 것도 학생들을 가르치며 받았던 가정교사 보수로 했고, <이대학보>도 돈만 생기면 잡지든, 신문이든 아버지날을 광고하던 신문 중의 하나였다.     

물론 당시에도 많은 대학교와 대학신문이 있지만, 돈이 없는 대학생 필자가 모든 대학신문에 아버지날을 알리는 광고를 할 수는 도저히 없는 일이었다. 아무래도 아버지를 남자대학교의 무뚜뚝한 아들들보다는 여자대학교의 귀여운 딸들이 더 좋아할 것 같아 딸들이 제일 많이 다니고 졸업생이 많은 여자대학교인 <이화여대>의 학보인 <이대학보>에 광고하면 머리 좋고 효심 많은 이화여대생들이니, 아무리 작은 지면의 광고라도 아버지날 제정하게 하자는 나의 뜻에 공감하고, 그 광고를 본 이화여대에서 언젠가는 아버지날을 만들고 행사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숙명여대도 생각하지 않은 바는 아니나광고는 이화여대에만 했었다. 내게 광고할 돈이 더 있었다면, 분명히 우리나라의 2대 명문 여대인 숙명여대에도 광고를 했을 것이다. 이점 지금도 해당학교인 숙명여대는 모르고 있지만, 당시에 숙명여대에도 꼭 <아버지날>광고를 하고 싶었었음을 이대학보에 광고를 한 지 38년이 지난 시점인 오늘 숙대인(淑大人)들에게 고백하게 되었다.   

필자는 선린상고를 다녔기 때문에, 선린상고의 인근에 소재한 숙대를 잘 알고 있었고, 누나가 없는 고등학생이었기 때문에, 숙대에 다니는 누나라도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숙대 앞을 지나가거나 숙대 뱃지를 단 누나들을 볼 때마다 혼자 남몰래 선망하던 시절이었기에 대학생이 된 후에도 숙대를 좋아 하고 있었다.   

 각혈을 하고 잔디밭에 누워 절망가운데서도 희망을 가진 것은 신약성경 말씀을 자주 읽고 기도하는 가운데서, 예수님이 늘 용기를 주시는 은혜를 믿었기 때문이다. 중 3학년 올라가면서 세례를 받았는데, 죽음에서 부활하신 그 예수님께서 나에게 주신 사명이 바로 ‘사라져가는 효친경로사상을 부활시키라.’ 였기에, 나쁜 건강을 무릅쓰고 기도하며 살아갈 수가 있었다.   

 기독교 계통학교인 이화여대 신문에 광고를 하게 된 것도 예수님이 주신 아이디어였고, 그 아이디어로 이대학보에 광고한 지 만 3년이 지난 1971년 6월 12일에  드디어  이화여대 기독교학과에서  <이화의 아버지날>이 탄생하였음은 꿈이 아루어진 역사적인 사실(?)이 되었다. 아버지날을 만든 이화여대에서 "이화의 아버지날을 발전시켜서 앞으로는 전국적인 아버지날로 하겠다." 고 하였으며, 이후 이처럼 아버지날이 만들어지고 있음을 알게 된 박정희 정부에서 ‘우리나라에 무슨 날 무슨 날 해서 날이 너무 많으니, 외국처럼 어머니날과 아버지날을 따로 행사하고 기념하기 보다는 두 날의 뜻을 합친 어버이날로 하기로 한 것’이 1973년부터이다.

 근엄하신 박 대통령이 아버지날에 대하여 많은 관심을 가지셨던 점은 필자의 훗날 졸저(拙著)에서도 잘 나온다. 고등학생이던 필자가 1,252명에게 앙케이트 조사 발표한 근거로 아버지날을 만든 지 만 10년, 이화여대에서 아버지날을 행사한 지 만 2년 만이다. 어버이날은 아버지날을 만들고 아버지날을 매년 혼자 외롭게 지내던 나에게는 물론이고, 각가정마다 애쓰시는 아버지들에게도 카네이션을 달아드리게 되고 감사하게 되었으니, 부모 인구의 절반인 아버지들에게도 얼마나 축복된 일인가!

 필자는 5월 8일 어머니날이 아버지날의 뜻이 포함된 어버이날로 변경된 바로 그 해인 1973년에, 하느님이 주신 좋은 아내 강연식(姜姸植)과 결혼까지 할 수 있었으니,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아내의 말인즉 나와 결혼한 것은 순전히 동정심(同情心)에서였다고 한다. 몸도 허약한 무명청년이 아무도 알아주지 않은 일로 10년 가까이 고생하는 것이  안타까워 조금이라도 도와주려는 동정심에 도와 주고 싶어서 더 좋은 사람이 나타났는데도 불구하고 내가 불쌍해 얼굴을 보면 차마 고만 만나자는 거절을 못해고 나를 택하고 말았다고 한다. 결혼 후 지금도 30년 가까이 여자고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으면서, 필자를 위하며 사랑해주고 있다. 정말 죽어서도 감사할 일이다. 그래서 필자는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인 것으로 여기며 아내에게 항상 감사하고 있다. 

 언제 죽을지 모르고, 아무 희망이 없었고 대학졸업도 걱정하던 필자가, 아내를 만나 대학원을 졸업하고, 감정평가사도 되고, 국영기업체인 한국토지공사에 들어가 20 여년을 재직하면서, 노인의 날 제정 노력을 계속하던 중에 부장으로 근무하던 1997년에 국가에서 제정되는 결실을 보았다. 

다시 말해, 1968년에 필자가 만들었던 노인의 날이, 29년의 세월이 흐른 1997년에야 국가에서 제정되었고, 오는 10월 2일의 노인의 날은 제 10회가 된다. 아버지날은 16살에 만들어 25살에 어버이날이 되는 계기를 만들었고, 노인의 날은 21살에 만들어 50살에, 한국토지공사에 근무한 지 20년만에 제정된 것이다.   

 애써 만들기만 했지 나의 죽음과 동시에 아무도 모르는 일이 될 것으로만 생각했던 위 두 날이 각각 빛을 보아서 기쁜 마음은 나만이 아닐 것이다. 아버지날을 만든 사람이라고 해서 하는 말이 아니라, 아버지날이 어머니날에 편입되어 <어버이날>이 되었으니 망정이지 지금도 5월 8일이 어버이날이 아니고 옛날처럼 <어머니날>이기만 하다면, 1997년의 IMF 여파가 아직도 가시지 않아 직장에서 조기퇴직 당하는 가정의 아버지들이, 언제부터인가 월급봉투마저 거의 아내 통장으로 들어가는 요즘의 힘빠지고 주눅드는 세상에서, 40대 후반~ 50대 초반으로  직장 동료보다 나이가 몇살이라도 많거나 능력없다고 내일 어떻게 될지 정년 보장 없는 가정의 아버지들이 그나마 위로 받을 곳은 어디이겠는가?  어머니날이 아닌 어버이날이 아닌가? 

평생직장으로 알고 들어갔던 직장에서 물러나야 하는 당사자나, 중간에 물러나온 중장년의 아들들을 보고 있어야할 뿐 아무런 도움도 못주는 부모인 할아버지와 할머니들!  노인들이 세월이 흘러가고 나이 들어 갈수록 사회와 당신 자손으로부터 소외당하고 대접 못 받는 노인들이, 일년에 하루 있는 <노인의 날> 마저 국가에서 없다면, 한가정과 이나라 자유 민주 대한민국을  맡아 살아오신  늙고 병들고, 심신이 예전 같지 않는 노인분들은 도대체 어디서 무엇으로 위로를 받을 것인가? 

필자가  아버지날과 노인의 날을 만든 것을 생색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필요해서 만들어진 다른 여타의 날들보다 못할 것이 없다는 생각에서, 오래전부터 힘껏 각종 언론기관을 통해서 <어버이날>과 <노인의 날>을 공휴일로 할 것을 제안하고 있지만, 공휴일이 많다는 이유로, 국군의 날 , 한글날 , 10월24일 유엔데이  등에 이어 올해부터는 4월5일 식목일마저 공휴일에서 제외되는 현실에서, 어버이날과 노인의날을 그냥 쉬는 날이 아니라 ‘효를 실천하는 공휴일’로 할 것을 만들 당시부터 계속 호소해왔지만, 개인인 필자만의 힘엔 한도가 있어서 현재까지 공휴일이 되질 않고 있다. 

어버이날까지 공휴일로 하기가 어렵다면 올해로써 제10회가 되는 노인의 날만이라도 앞으로 공휴일로 해주실 것을, 이제 임기가 2년도 채 안 남은 노무현 정부에 간곡히 청원하고 싶다. 어린이날은 공휴일인데, 노인의 날이 공휴일이 아니라서 하는 말이 아니다. 경로사상이 우리나라만 못할 것 같은 일본이 오래 전부터 9월15일을 경로일이라 하여 공휴일로 하고 있다. 노무현 대통령 임기중에 안 되면, 그 다음 대통령, 그 다음 대통령 때 안 되면 그 다음 대통령의 정부에서라도 노인의 날을 꼭 공휴일로 정해주실 것을 거듭 간절히 호소하고 싶다. 물론 내년에 회갑을 맞이하는 필자가 노인의 날이 공휴일이 되는 그 때까지 살아 있지도 모르지만…. 필자가 죽은 후에라도 노인의 날이 공휴일로 제정되었으면 하는 소망이다. 어린이 날을 만드신 방정환 선생은 어린이날이 제정되는 것도, 공휴일로 지정되는 것 못 보시고 작고하셨다. 

 사회에 영향력 있는 그 많은 정치인과 국회의원, 사회저명인사, 노인단체, 효 관련단체, 언론기관들은 이런 일엔 왜 관심 밖인지 모르겠다. 각가정과 사회와 국가에서 존경받아야 할 어르신들이 날이 갈수록 앉을 자리, 설 자리, 마땅한 자리가 없어지고 있다. 어르신들을 존경해드리는 차원, 노인복지 차원에서라도 ‘노인의 날을 효 실천하는 공휴일’로 함은 정말 좋은 일이라 생각한다. 노인의 날이 김영삼 정부 때 제정되었고 노무현 정부에서 제장한 것이 아니긴 하지만, 없는  노인의 날을 새로 제정해 주십사 청원하는 것이 아니고, 이미 제정되어 있는 노인의 날이니, 노무현 정부에서 마음만 조금 넓게 쓰면(열린 마음으로 노력해주시면) 노인의 날 공휴일 지정이 불가능하기만 한 것은 결코 아니라고 생각된다.  노인은 우리의 부모요 조부모요 시회의 선배요 인생 백과사전이시기에 가정과 사회와 국가에서도 합당한  대우가  필요하다. 노인은 결코 경원(敬遠)해야 할 존재가 아니다.

 핀자는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온갖 잡병으로 살아간다고 말한 바 있지만, 한국토지공사에 들어간 후에도 기관지 확장증,  만성 화농성 중이염 수술, 양쪽 축농증 수술, 심지어 대장암 수술 등 많은 병을 수술하고 친구삼아 살아가고 있다.

사장될까 걱정했던 위 두 날이 모두 빛을 본 것을 감사드리고 있지만, 나의 아버지는 70세부터 13년을 위암수술과 폐암과 그 후유증으로 고생하시고, 어머니는 8년 전부터 노인성 우울증으로 고생하시더니 자살을 기도하고, 도무지 움직이기를 싫어하시다가 자력으로는 조금도 걷지 못하게 되어 조그만 요양원의 교회 목사님의 도움으로 살아가시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필자는 6년 전에 대장암이 발견하여 수술하게 되었을 때, 책이라도 한 권 남기고 싶었다. 한 가정에서 아버지와 아들, 부자(父子)가  암을 같이 앓아야 하다니!  오, 마이 갓!!

 부랴부랴 수소문해 서울아산병원에서 대장암 수술을 받고 필요한 항암주사를 맞으면서, 죽기전에 책을 하나 남기면 여한이 없겠다는 생각을 했었기에, 책을 끝마칠 때까지만이라도 살게 되기를 기도하게 되었다. 간절한 기도는 하느님이 들어주신다는 것과 하느님은 누구에게나 참을 만한 고통만 허락하신다는 것을 나 자신의 직접 체험과 수 많은 사람의 간증을 통해 알았기에 정말 열심히 기도하면서 책을 썼다. 책이 나온 후, 전국의 공공도서관과 대학도서관에 한 부씩 900여 곳에 기증했다.   

 비록 보잘 것 없고 잘쓰지 못한 책이지만,  실제로 효를 배워 알고 실천해야 할 청소년인 고등학생과 대학생은 물론  한국人이라면 적어도 성별, 직업, 나이에 관계없이 꼭 읽어주었으면 하고 바랐기 때문이다. 전문 작가들이 보기엔 서툴기 짝이 없겠지만 현재 어느 시점에 있는  누구나 라도 이 책을 읽으면 자녀로서, 지금 생존해 계시거나 돌아가신 부모님을 한번은 더 생각하게 되고 아무리 혼란한 세상, 불의가 만연한, 어려운 환경속에서도 제정신으로, 올바른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게 하는 용기를  주리라고 확신한다. 

순간의 선택이 일생을 좌우한다는 말 그대로, 나의 아내는 순간의 선택을 잘못해서 나와 결혼한 까닭에 지금도 고생만 하고 있으니, 정말 미안하다는 말도 염치가 없어 하지 못한다. 수많은 동료 여교사와 학교 동창들이 구김살 없이 잘 사는 모습을 내가 훤히 아는 까닭에, 시아버지와 남편은 위암 페암 대장암, 시어미니는 극심한 우울증인 가정에서 살아가야 하기에 참으로 미안하고  미안하면서도 말이다.  이제 얼마 후면 어버이날이 있고 가정의 달인 5월이 다가온다. 

 세상이 아무리 변하고 시대가 바뀌어도 변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 부모의 자녀에 대한 사랑이요, 자녀의 부모에 대한 효도이다. 어버이날이 있는 5월을 맞이하면서 모든 가정의 화목과 이웃과 사회의 질서와 글로벌 시대인 이 세상의 진정한 평화를 위하여 상경하애(上敬下愛)정신과 효친경로사상이 부활되기를 다시 한번 소망해 본다. 

  ☎ 출처 : 『참좋은이들 21』 2006 년 5월호/ 10월호 ·  『효도실버신문』 2006.4.30 · 『노인신문』 1991.10.5  · 『대한노인신문』2011.3.5 /11. 9.5 · 『이 지구상의 모든 아들과 딸들에게』 2013년 저서 333 페이지/336페이지 · 『효친경로사상의 부활을 위하여』 2003년 저서( 290 페이지에 1991년에도 노인의 날  공휴일 제정돼야 한다고 나온다) · SBS [유영미의 마음은 언제나 청춘] 방송출연 제4회 노인의 날 기념 2000.10.5 등